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화단 운동 (문단 편집) === 8개국 연합군 결성 === || [[파일:Navy troops of Eight Nation Alliance during the Boxer Rebellion.jpg|width=100%]] || || 8개국 연합군 해군 || || [[파일:attachment/Boxer_Rebellion.jpg|width=100%]] || || 의화단의 공격에 맞서 교전하는 영국군과 일본군 || 당시에는 서구 열강들끼리 경쟁 대립 구도, 혹은 적대 구도가 있었는데 "[[그레이트 게임]]"(영국 ↔ 러시아 제국)이라든지 "[[비스마르크 체제]]"(프랑스 제3공화국 ↔ 독일 제국 +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 + 이탈리아 왕국), 영국 ↔ 프랑스 제3공화국([[파쇼다 사건]]), 러시아 제국↔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 등의 분쟁이 빈번했다.[* 심지어 이 같은 구도에 섰던 국가도 100% 같은 편은 아니었고 경쟁과 이해득실을 가리고 있었다.] 그러나 이들 모두(+일본 제국)는 의화단에 의해 자신들의 이권이 침탈당하고 자국민이 학살당하자 그에 분노해 연합군을 조직해 청을 공격하기로 결의했다. 그 수는 지상 병력만 약 50,000명에 달했다. 이 중 주력은 [[일본군]]([[일본 제국 해군#s-9|육전대]] 포함 21,000명)과 [[러시아군]]([[수병]][[연대(군대)|연대]] 포함 13,000명), 그리고 [[영국군]]([[영국 해병대|해병대]] 포함 12,000명)이었으며, 여기에 [[프랑스군]]과 [[미군]]이 각각 3,000명, [[독일 제국군]]이 해군 보병과 [[육군]]을 포함 900명, [[이탈리아 왕국군]]은 [[해군]] 함정과 육군의 [[베르살리에리]] 연대[* [[제2차 세계 대전]] 때 닭털 꽂고 다니기로 유명했던 바로 그 정예 부대다.]를,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]]은 해군 함정만 파견하고 각 함정의 육상병력을 모아 [[중대(군대)|중대]] 이하 규모로 명목상의 지상군을 편성해서 독일군 또는 영국군의 지휘 아래에 들어갔다. 원정군 사령관은 병력의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국 외교관이 피살된 [[독일 제국]]에서 맡아 총사령관으로는 [[독일 제국군]] 참모본부 참모총장을 지낸 독일 육군 제3군 사령관 [[알프레트 폰 발더제]] 육군 [[원수(계급)|원수]]가 임명되었다. 그가 부임도 하기 전에 일단 청 정부는 연합군에 굴복했으나, 이후 1년간 중국에 주둔하면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. 다만 그가 사실상의 전제군주인 독일 황제([[카이저]])의 신하이며 [[백작]] 작위를 소유한 귀족[* 안할트 데사우 공 레오폴트 3세의 [[사생아]]의 후손이다.]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화국 군대인 프랑스군과 미군은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.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800px-CaptureTianjin.jpg|width=100%]] || || [[톈진]]을 함락시킨 연합군 || 한편 동남지방의 [[청나라]] 원로 관료들은 <동남자보선언>으로 의화단의 세력 확대를 저지했고 이에 군사력을 집중할수 있게 된 열강은 텐진을 공격해 함락했다. 애초에 [[이홍장]], [[위안스카이]] 등의 청의 군벌들이나 지도층 대부분은 의화단을 진압해야 할 도적으로 보았지 손을 잡을 상대로 보지 않았다. 이것 때문에 의화단과 손을 잡으라는 서태후의 명령을 소식을 못들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>'''"태후 폐하가 내린 명령은 의화단이나 그들과 손잡은 간신배들의 수작이니 조작된 것이거나 감언이설에 넘어가 상황을 오판하고 내린 명령임이 분명하므로 따를 이유가 없다"''' 는 이유를 대며 의화단을 저지하는 판이었다. 이에 따라서 연합군은 후방을 걱정할 필요 없이 북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. 8개국 연합군 내에서 서로간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[[베이징]]으로 진격했다. [[러시아 제국]]은 이때 [[만주]]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는 등 세력 확장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[[영국]] 등 다른 열강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. 특히 영국은 러시아에 팽창에 맞서 '그레이트 게임'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연합군을 상대로 청나라 군대와 의화단 군대는 계속해서 패배했다. 청군과 의화단의 무장이나 조직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. [[의화단]]이야 말이 좋아서 반외세, [[반제국주의]] 운동이지 그 실체는 깡패 집단과 도적단, 사회하류층이 섞여있는 폭도였고, 청군은 청 내부의 기득권층에 의해서 방해받은 개화 때문에 전근대적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